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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생과 사의 덫, 매혹, 틈의 살

 

양효실(비평, 미학)

 

 


미술은 죽음이 새어나오는 현장, 장면이다. 산자와 죽은 자, 이승과 저승을 매개하는 이들이 미술가의 전신이라는 것도, 죽음에 인접한 유기체의 부식과정 혹은 상태를 보존하는 곳이 미술관의 전신이라는 것도 그런 사실을 보충하는 전거이다. 죽음에 잠식당하거나 삶이 팽배하면 미술은 버티지 못한다. 미술은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그러나 죽음에 사로잡힌 삶이나 삶에 포박당한 죽음과 같은 과잉/울혈을 풀어주고 그 둘의 ‘적절한’ 중첩을 조율함으로써 죽음과 ‘함께’ 삶이 공존하도록 만들어주는 중간지대이다. 현대에 이르러 죽음은 부정적인 것으로 일상-시야에서 점점 사라지도록 관리되는데, 그만큼 비가시적인 것으로 배제된 그것의 뜻밖의 유출, 노출은 충격으로 공포로 다가온다. 그 둘이 사실은 구별불가능한 것이라는 인식은 그 둘의 구별가능성에 의해, 건강이나 위생과 같은 근대적 관리 체제에 의해 은폐되고는 한다. 생산주의, 미래에의 약속들, 온갖 예방장치들이 우리의 삶, 상상력, 의심을 죽이면서 죽음을 부정적인 것, 화해불가능한 것, 죽여야 할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나의 죽음은 의사의 것이고 타자의 죽음은 내 삶에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지 않을 것처럼, 잘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미술은 죽음이 새어나오는 틈(crack)이다. 죽음을 기억하려는 미술은 이리로 오고 있는, 막을 수 없는, 이미 항상 새나오고 있는 죽음, 타자의 운동을 복기하는, 추적하는 삶의 운동방식이다. 취약한 신체를 비스듬하게 제대로 오랫동안 응시하면 거기에는 온갖 죽음의 징후들, 은유들, 형상들이 흥건하다. 신체는 이미 구멍이 숭숭 뚫린 집이고, 얇은 막이고, 벌써 터져서 짓물, 피, 오줌이나 똥이나 침과 같은 분비물들이 새고 있는 틈이다. 이런 사이, 매개 장소, 환승지대, 경계를 어떤 관념이나 상투형 없이 응시하려는 노력, 혹은 김남훈의 말대로 하면 “헛짓”이 미술“하기”, 뭘 하는지 읽히지 않는 데 뭘 하고 있는 미술가의 “짓”이다. 생산, 가치, 효용, 유익, 상징, 의미의 맥락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그런 하기로서의 미술하기. “Maybe that’s nothing special”(김남훈의 영상 작업의 제목처럼)   
대학 졸업 전후 김남훈 작업의 시각적 엠블럼은 청테이프였다. 사람들은 청테이프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난, 노동, 근면과 같은 개념을 근거로 그의 작업을 미술의 사회적 기능에 귀속시켰던 것 같은데, 사실 청테이프는 가난한 사람들이 웅숭그리고 모여 사는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필수품 중 하나였다. 197,80년대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리고 지금도 변두리에서는 흔히 보게 되는 가옥은 대충 ‘부로크’를 쌓아올려 얼기설기 지어졌고 그런 불완전한 집들은 언제나 바깥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틈들로 한가득이었다. 미술하는 사람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 방의 시각적 풍경은 “창틀 사이사이에 새어나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구석구석 발라진 청테이프”이고, 그는 새는 안, 통하는 안에 대한 유년기의 기억을 청테이프로 현시했다. 더욱이 청테이프는 김남훈에게는 계속 살아있는 자신과 그때 그 방에서 죽은 누이들 사이를 ‘흐릿하게’ 연결하는, 생과 사의 분리불가능성을 은유하는 물건, 지표이기도 하다. 창틀에 붙여진 청테이프는 비가시적 틈의 집요한 가시성, 지우고 배제하고 은폐하려하지만 엄존하는 타자의 현시인 것이다.  
이쪽으로 새어나오는 저쪽, 이쪽의 취약하고 미약한 존재들을 파괴하는 저쪽과 대결하는 작가의 손에 든 ‘무기’가 고작 청테이프, 빨간약, 페트병, 지푸라기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즉 이미 항상 패배의 징후를 적재한 무기들이기에 그의 싸움은 어리숙하고 미적지근하다. 지구온난화에 대적하는 몽고인의 나무심기나 허름한 가옥을 손질하는 미장이의 노련함이나 트럭에 물을 싣고 가 목마른 짐승을 구하는 아프리카인의 대범함에 우리는 이미 감동해 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김남훈의 수사는 그의 싸움의 방식이 적절하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그것이 “한 여름날 바람에 날리는 여인의 옷자락 마냥 가볍다”면, 전투전략 역시 가벼울 것이다. 이 싸움은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가벼운 죽음의 지표들을 생의 한 가운데로 끌어들이고 그것을 미술하는 사람의 시각적 엠블렘으로 제시하는, 그럼으로써 한없이 가벼운 생에 예의를 갖추려는 것 아닐까? 작가는 입속에서 바스락거리다가 사라지는 과자 봉지의 찢긴 귀탱이를 모으고, 레지던시로 들어간 작업실에 들어왔다 죽은 날벌레를 모으고, 거리에 남겨진 사람들이 흘린 흔적들(있었음에 대한 물리적 지표들?)을 모으고, 자신의 손이나 발과 같은 신체의 상처를 별 의미없이 찍어서 모으고, 인도에서 자라나는 잡초들에게 대충 물을 주고, 건물 바깥벽의 크랙에 청테이프를 붙이고. 심지어 들판의 풀들 위에다가도 청테이프를 붙이고....  
“극히 개인적인 사건에서 출발한” 작가의 청테이프는 빨간약(요오드액)으로 대체되면서 공공성을 획득하고, 두 물질은 미술가의 ‘헛짓’ 안에서 “보호제, 보호막”을 위한 유사한 기능으로 분류되고야 만다. 물론 미술가 김남훈의 사적인 ‘용어사전’에서 이제 보호제­보호막은 잡초를 위한 페트병의 물, 폐염전으로 통하는 도로에 지푸라기로 만들어진 스프레이 형상 같은 것도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집, 콩크리트더미, 잡초도 모두 작가의 상처 입은 몸이나 살과 등치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불가능한 분류법, 상처 나는 살이나 죽어가는 몸을 중심에 둔 이 은유적 유사성과 차이는 ‘텅 빈 시간’에서만 가능한 “헛짓”이 아니었으면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행위가 시각적으로건 개념적으로건 아주 작고 사소하고 시시하며 감동 같은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이 거의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작고 시시한 삶의 ‘의미’에 바쳐진 것이기 때문임은 당연하다. 김남훈의 작업은 미술계에서는 사회적, 생태학적, 공공미술적 맥락에서 유통되고 있다고 보인다. 나는 이 글에서 그를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에서 흐릿하게 움직이는, 말하자면 존재론의 맥락에 있는 작가로 다루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사회적 예술과 존재론적 예술 사이에서 김남훈의 작업은 계속 쓰여지고 있게 될 것인지 모른다.      
김남훈의 작업에 ‘없는’ 것들을 나는 노동, 돈, 관념이라고 보고 있다. 그의 작업에는 개념미술가들이 실천하는 무의미한 반복과 그 반복을 제어하는 규칙이 엄존하지만, 그의 반복과 규칙은 정서적 감동, 개념적 유희, 장인의 축적으로서의 시간성이 부재하기에 심심하고 직접적이고 속이기가 없다. 심심하고 담담하고 밋밋한 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그의 죽음에 대한 은유가 “옷자락마냥 가볍다”에 멈춰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그의 문장 속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은유인바 “여인의 옷자락”, 이성애자 남성이 매혹당하는 여인의 옷자락의 가벼움이기에, 관능적인 살을 감춘 옷자락의 가벼움이기에, 결국 여인의 옷자락이기에, 이 가벼운 생에 속고 빠지고 더듬거리려는 욕망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김남훈이 자신의 작업을 놓고 “그 존재들과 만나게 되는 순간을 기억하고 떠도는 상처를 치유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을 돼새김질하고 수정하면서 다시 무엇으로 환원되길 바라며 이곳 저곳 여기저기에 누군가와의 소통의 순간을 위한 덫을 놓는 일”이라고 말할 때, 마지막에 등장한 “덫을 놓는 일”이라는 문장은 바로 그가 “바람에 날리는 여인의 옷자락”임을 알리는 ‘스포일러’처럼 다가온다. 가벼운 생과 죽음의 동시성,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소하고 시시한 행위들로서의 미술, 시각적 형상들이나 지표들을 갖고 있었음(왔다감, 일어났었음)으로서의 있음을 고지하는 김남훈이 놓은 “그 덫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의식하게 되는 순간 같은 코드로 접속하게 되는 것”이고, 그를 이끌고 있는 틈은 우리가 계속 매혹당하고 속는, 다시 말해서 계속 사는 장소, 방식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게 된다.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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