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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우리의 위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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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단순히 불균형이나 부조화일 뿐 아니라 또한 그 무엇보다도 새로운 균형을 얻기 위해 인간 내부에서 자연이 시도하는 노력이다.” 나의 고민을 잘 대변해 주는 듯 조르주 캉길렘의 이 짧은 한 문장은 내게 많은 영감을 준다.

덧붙여 그는 질병은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화된 반응이며, 유기체는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질병이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질병은 내가 알고 있던 더럽고 위험하고 피해야 할 어떤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반겨야 할 존재란 말인가?

청테이프 작업은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목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어느 한 사람의 죽음이 흰색 스프레이 선으로 남고, 그 표식을 볼 때 비로써 그 사고자를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한다. 그 전엔 미처 그를 알지 못했듯이. 그러한 흰색 스프레이 선을 내 기억 속 청테이프로 치환하고 기록하여, 수많은 익명의 죽음과 만남을 헤아려보는 작업이었다.

이후 나에게 중요해진 것은 사회적 맥락 안에 소외된 무엇을 단지 더듬어 보는 일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로부터 길 위에 버려진 사물들을 관찰하고, 경제적 논리에 철거된 건물의 폐허 속에서 수많은 세대가 거쳐 간 삶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또 소독약에 담그기도 하고, 번잡한 도시 한복판 콘크리트 틈새에서 자신만의 터득한 방법으로 치열하게 삶을 영위하는 이름 없는 잡초에 물을 주고, 내 몸에 생겨나고 사라지며 흔적이 되기도 하는 상처들을 기록하고, 여름 내내 방치된 창가에 먼지처럼 쌓인 수많은 날벌레의 죽음들에 나의 시선이 향할 때 그것이 약하고, 병들고, 더럽고, 아름답지 않다고 인식하는, 우리가 우리 중심적 사고에서 만들어 낸 수많은 편견과 오류들에 미미하게나마 그 반대되는 힘을 보태는 것이기도 했다.

질병, 통증, 공포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라 정상적인 신체 방어의 일부라고 진화 생물학에서는 말한다.

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하나하나의 경우들을 살펴보고, 헤아리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고자 함이 아니라 스스로 경험하기 위해 미약한 신호들을 감지하려 한 노력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의 시점과 이익의 해석이 아닌 내면의 정확한 방향 감각을 위해 무수한 신호를 보내고 돌아오는 신호로 나의 위치를 알 수 있듯, 가장 예민한 안테나를 세워  나의 작업이, 나의 질문이 내가 보낸 신호가 되어 되돌아와 나의 좌표를 알려주길 바란다.

-2018 개인전에 부쳐

2018.10월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짧은 소고
(소래 폐염전 프로젝트 ‘자정’-개인전 후 단체전 기획)

 

나는 자연을 ‘개발’하는 자이기보다 자연을 ‘사용’하는 자이기를 원한다 _리차드 롱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소래 생태공원에 마주 선 작가들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 그 시각적 디테일에 지배되어 아마도 이 물음에 모호한 입장에 빠져들게 되었을 것이다. 구획을 긋고 생태공원이라는 박제된 상자 안에 자연을 담고, 그 구획 밖에는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싼 도시, 아파트 그리고 개발의 잔재들. 늘 믿어왔던 자연은 이번에도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박제화 된 상자 속에서 햇볕과 갯바람만으로 많은 시간을 스스로 치유하며 자정능력(自淨能力)을 발휘해 인간이 이 땅을 잊고 있던 세월동안, 인간의 쓰임새가 없던 버려진 세월동안 그 폐허 속에서 자신들의 시간으로 끊임없이 정성껏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우리가 개발에 반하는 보호, 보존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 자연은 이미 거칠게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살아남기 위한 끝없는 경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래프로젝트는 도시개발도 환경단체의 생태보존의 주장도 모두 무색하게 하고 숙연하게 만든다. 어느 입장에서도 결국 인간의 입장을 고려한 것은 아닐까? 작가들은 이 공간을 소요하며 이 장소가 갖는 기억과 역사를 더듬으며 여기서 발견한 조건들에 의존해 흔적 남기기를 시도한다. 이 장소의 매력은 자연의 경이로움 만에 있지 않다. 타일 조각을 비집고 자라는 해초, 건물 잔해의 모양만을 피해 군락을 이룬 들풀들, 땅에 반쯤 잠긴 비닐포대에 기생한 이끼, 오랜 시간동안 갯벌이 육지화되면서 바다 식물과 육지 식물이 공생하는 기묘함과 그것의 미학이 또한 커다란 매력이었다.

그 속에서 작가들의 작업은 흔적이 되고 자연은 또 그 흔적을 품 안에 거둔다. 그리고 작업은 소멸하지 않고 다른 무엇으로 전이된다. 작업은 과정과 시간 속에서 그렇게 끝없이 변모한다. 

인천시의 도시계획으로 현재 77만 평의 그린벨트 지역인 소래생태공원 주변은 골프장 건설계획의 백지화에 이은 다각도의 개발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이에 시민단체와 환경단체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자연유산을 지켜내자는 캐츠프라이즈로 맞서고 있다.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근대적인 사고의 가치였다면, 개발의 주목적은 경제 실리의 관점일 것이다. 현재 시점의 개발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개발이 곧 환경파괴로 인식하는 것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소래프로젝트에서 작가들의 작업은 그러한 개발을 비난하고자 또 환경단체를 두둔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개발만이 실리가 있고 이익이 있다는 착각을 깨우치듯 도시의 한 부분을 비울 줄 아는 여유를, 개발과 보존이 자연이 터득한 공생의 방법처럼 조화롭게 자연의 거기에 순응하고 용해되는 것처럼 작가들은 자연을 통해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작업을 통해 사유했으리라. 작가들은 되도록 이곳에서 얻은 지형적 조건과 재료만으로 최소한의 노동과 행위로 자연에 접근하였고 소유할 수 없는 그 말은 반대로 누구나 소유 가능한 작업을 했다. 어떤 작업은 설치 후 다음날 비가와 하루가 채 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작품도 있었다.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이 남기고 간 이름들, 사랑의 징표 그 흔적들처럼 작가들의 작업은 흔적으로 남고 많은 시간을 보낸 뒤 자연의 방법으로 자연과 함께 공생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어떤 무한 가능성을 남겨둔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인간의 파편과 함께 공생할 줄 아는 자연의 자정(自淨)은 아닐는지.

2005

 

해주(海湊)-개인전에 부치는 글

 

나와 폐염전(廢鹽田)과의 만남은 1년 전 이사를 오면서 새로운 나의 영역이 된 낯선 동네를 염탐하던 중 멀지 않은 곳에 폐염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였다. 그 이름은 상상만으로도 내게 호기심을 가득 안겨주었고 간단한 작업도구를 서둘러 챙겨 도착한 그곳은 초입부터 입을 다물지 못한 나를 흥분 시켰다.

끝없이 펼쳐진 버려진 땅. 

200만㎡라는 거대한 땅은 아주 멀리 그 끄트머리 즈음에 병풍처럼 보이는 희미한 아파트를 제외하곤 사람의 땅이 아닌 광고 카피에서처럼 그야말로 바람이 지나가는 비어있는 자리였다. 흙인지 개펄인지 알 수 없는 희끗희끗한 소금기 베인 땅에 키만큼 자란 마른 갈대숲 사이를 지나면 당시 염전으로 사용할 때 만들었을 토판(土板)의 네모진 곱고 평평한 땅과 바닥에 깔린 검은 타일(tile)사이를 비집고 자라난 알 수 없는 묘한 식물들이 자줏빛으로 자라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래전에 버리고 간 흔적들과 군데군데 보이는 무너져 내린 수십 개의 소금 창고들이 이곳을 아주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었고 염전시설과 도구들은 반쯤 땅에 묻혀 여기저기에 뒹굴고 비가 오면 간수를 옮겨 보관했다는 해주(海湊)는 이미 수년 동안 빗물에 잠겨있었다. 마치 영화 매드맥스의 배경같이 전쟁 후 남은 폐허 잔해들처럼 음산한 기운마저 들게 하는 벌판이었다.

인간의 쓰임새에 운명이 좌우된 듯 자연은 포구가 되어 배가 오가기도 하고 염전이 되기도 하고 버려져 방치되기도 하고 다시 그 쓰임새를 찾으면 개발되고 용도에 따라 다시 변모한다. ‘식물의 사생활‘ 저자 데이비드 애튼버러(David Attenborough)는 식물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인간과는 다른 시간 단위로 끊임없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투쟁하고, 확장하고, 적을 피하고 이웃을 이용하면서 거칠게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살아남기 위한 끝없는 경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 버려진 땅 폐염전에서 만난 고동, 해홍나물, 나문재와 칠면초, 갯패랭이, 풀망둑 등의 셀 수 없이 많은 들풀과 해초, 어류, 조류는 햇볕과 갯바람만으로 많은 시간을 스스로 치유하며 자정능력(自淨能力)을 발휘해 인간이 이 땅을 잊고 있던 세월동안, 인간의 쓰임새가 없던 버려진 세월동안 그 폐허 속에서 자신들의 시간으로 끊임없이 정성껏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인간은 이러한 생명의 의지조차 임시로 간수를 저장하는 해주처럼 필요에 의해 창고에 보관하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인간의 자정능력의 한계를 넘기 전까지는 작은 생명들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자정능력의 한계를 넘어버린다면 자연 또한 자정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 속에서 내가 한일은 발견이었다. 흙길에서 가끔 다니는 차에 눌린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를 주섬주섬 모아서 도시에서 이곳을 올 때 발견한 교통사고 현장의 스프레이 형상을 그대로 옮겨 놓기도 하고 그 형상대로 타일을 떼어내기도 하고 땅을 파내 함정을 만들어 내기도하고 가뭄에 굳은 진흙의 껍질들을 없애면서 형상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소위 그 곳에서 나는 인간의 행위를 하였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의 자정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공존하길 바라며 그 경계에서 내 작업 또한 그 속에 버려져 많은 시간을 보낸 뒤 스스로 적응하며  자연의 시간단위에서 자정(自淨)하기를 바란다.              

2005. 7

 

유운에게

먼저, 다중에 있어서 노동의 문제, 근대적 노동의 의미에 반하는 비생산적인 활동, 비 임금노동, 경제구조 속의 잉여가치를 가지지 않는 등의 문제는 나의 작업에 하나의 고민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직접적인 노동의 맥락을 주제로 작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작가의 노동, 노동 자체에 종속하지 않은 노동을 행하는 것에 주목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근대적 노동의 농후가 짙은 한국적 상황에서(과학적 진보에만, 먹고 사는 문제에만, 물질만능, 1등 추구 등) 현장에서의 작가적 노동은 한낱 쓸모없는 헛된 것으로 보이는가 싶습니다. 작업 중에 만나게 되는 익명의 사람들이 내게 던지는 지나가는 질문들은 “지금 무엇을 하는 건가요?” 인데, 짧은 몇 초간 내 스스로 타협하고 배려한 말로 “미술 합니다.”라고 대답하면 대부분 고개를 절래 흔들며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게 되는 상황이 그 예입니다. 그 들로선 나의 작업 행위가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멀쩡한 테이프를 사서 무너진 콘크리트를 보수 하고 있다는 것이 가까운 작가의 말을 빌자면 “익은 밥 먹고 설은 짓한다“처럼 비춰졌나 봅니다. 무엇이 더 나은가? 무엇이 더 생산적인가? 에서 나의 행위들은 한낱 설은 짓에 불과하게 되는 순간을 만나게 될 때의 공허감이 바로 아직 한국적 상황에서의 ‘나’의 노동인 것 같습니다. 나의 작업은 점점 더 물질적인 생산품을 피해가고, 속도에서 벗어나고 억지를 부리고 그 미완을 더욱 합리화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극히 개인적인 사건에서 출발한 나의 작업은 ‘나’란 개인의 사적 내러티브는 거대한 사회적 포맷을 가진다고 보고 이미 개인의 경험은 사회적이고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수집한 교통사고 현장의 스프레이선, 내 몸에 나고 없어지고 흔적이 되는 상처들 그 존재들과 만나게 되는 순간을 기억하고, 떠도는 상처를 치유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을 되새기고, 다시 무엇으로 환원되길 바라며 이곳 저곳 여기저기에 누군가와의 소통의 순간을 위한 덫을 놓는 것입니다. 그 덫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의식하게 되는 순간 같은 코드로 접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견하되 지나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와의 접속을 언제나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접속의 순간에 사실 생산물은 발생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작가의 노동, 행위(실천), 던져짐을 현재시점의 노동의 맥락에서 찾아보며 ‘가치’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2005

 

 

 

 

사라짐에 관하여...

 

 

나에게 사라짐이라는 단어는 마치 한 여름날 바람에 날리는 여인의 옷자락처럼 가볍다는 느낌으로 맴돈다. 사라짐은 내가 어찌할 수 있고, 없고의 차원이 아닌 수동적인(결정론적) 것에 가깝고 인위적인 사라짐 또한 능동적(자유의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또한 사라짐의 이유가 있고, 새로이 존재가 되는 것도 그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사라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고가, 복개 구조물이 사라지고 그 주위의 삶의 환경이 사라지는 모습에서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생각들이 오가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단지 애정의 다른 표현일까? 문화재를 두고 보수하고 보존하는 것의 문제에서도 같은 의문이 든다. 나와 시간과 공간이 전혀 다른 경험에서 얼마만큼 감동으로 전해지는가는 가늠하기가 너무 어렵다. 그렇다고 그것의 존재를 가벼이 여긴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 내가 감동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싶은 욕망이 더욱 크고 그러기 위해서 얼마만큼 다른 변형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다만, 청계천 복원 공사 같은 도시 리노베이션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완전한 제거가 아닌 재생의 의미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삶의 환경이 사라지는 것이 오염된 한 부분을 적대시하여 수술하듯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오염마저 새로이 친화적으로 다스릴 방법으로 재생되는 의미 말이다. 내가 그곳에서 한 것은 사라진 뒤의 공허감과 결핍을 어루만지는 일시적인 제스처였다. 사라지는 것들과 함께 내 작업도 사라지길 바란다. 사라짐으로써 어떤 무한 가능성을 남겨둔다. 그 사라짐의 순간을 그린라인으로 선명히 드러내며...

 

 

청계천프로젝트 물 위를 걷는 사람들 전시회에 부쳐

-2003.6

 

 

 

 

죽음에 관한 기억

독담

라디오를 듣고 있던 나는 디제이가 소개하는 한 사연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내가 얼마 전 난생처음 목격한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였다.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그 버스 정류장에서 머리칼이 다 서버리는 듯한 섬뜩한 교통사고 광경을 눈앞에서 보았다. 순간 빠르게 119에 전화해야겠다는 본능이 전화를 꺼내게 했다. 수십 명의 목격자 중 나는 잠시 망설여졌고 그사이 다른 사람이 119에 전화를 걸었다. 나를 포함한 목격자들은 버스 밑에 누워있는 한 아주머니에게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밖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거나 잘못 건들이면 더 크게 잘못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내, 우리의 몸을 막고 있었던 것 같다. 안타까움과 빠른 심장 고동과 불안감으로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는 한 목격자가 마치 경험이 많거나 혹은 영웅담처럼 “저럴 때는 건들이면 큰일 나 도와주다 잘못되는 날엔 책임을 뒤집어쓸 수 있어.”라고 하는 말에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사고 현장을 뒤로하고…

내가 초등학교를 막 입학하던 해의 겨울은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웠다. 그 겨울 지하실 집은 내가 빈부의 단위로 기억하는 첫 번째 집이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 날 밤 눅눅하고 냉기 가득한 그 지하 방에서 내 두 누이를 잃었다.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하다.

가족을 잃은 슬픔이 무언지 난 깨닫지 못하고 그들의 존재에 대한 기억이 무뎌지면서부터 그리움도 사라졌다. 그 지하 방은 창틀 사이사이에 새어 나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청테이프를 꼼꼼히 구석구석 발랐었다. 나에게 그 퀴퀴한 지하 방의 시각적 기억은 창틀에 발라진 청테이프가 유일하다.

어린 시절 내 기억의 청테이프는 많은 도움을 준 것 같다. 창틀뿐 아니라 찢어진 장판, 아버지가 읽으시던 책 겉표지에도 연기 나는 연통 사이 틈에도 항상 청테이프가 발라졌다. 나에게 있어 청테이프는 어떤 보호제, 보호막 역할로 기억되는 것 같다.

두 누이가 떠난 지하 방 창틀에 청테이프 기억은 교통사고 난 아주머니에게 테이프를 감싸주고 싶은 미미한 충동으로 엄습했었다. 라디오에서의 그 사고 이야기는 무단횡단하던 아주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으로 전해주었고 안타깝고 찹찹하고 심란하게 내게 기억을 남겼다. 그 뒤 버스 정류장에는 없었던 것들이 생겼다. 하나는 버스를 정리하는 교통경찰과 또 하나는 도로 위에 죽은 아주머니가 누워있던 형태를 따라 그려진 흰색 스프레이 선이다. 인사 사고 장소를 신랄하게 보여주는 흰색 스프레이 선이 지워질 무렵 다음 사고가 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무뎌질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든 비명을 달리할지 모른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누구나 교통사고 현장에서 스프레이로 그려진 흰 선을 달고 걸어 다닌다. 상상해 보면 그건 너무 소름 끼치는 일이지만 그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는지..

1999. 2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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