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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을 지연시키는 한 작가의 기록

심소미 / 독립큐레이터

말을 하는 순간 상투적인 게 되는 것들이 있다. 언어의 한계를 깨트리고 상상의 틈을 벌리는 것이 시인의 업보일 텐데 고백하자면 시인이 아닌 나는 이틈을 인식하자마자 그 안에 매몰되고 말았다. 이 기저에는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인식하는 사고의 한계가 있다. 마치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에서 학자가 사구를 찾아 들어간 것처럼 호기심으로 들어가 본 틈에 갇힌 것이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언어를 삽으로 하여 머리 위로 쏟아지는 모래를 내던져 보지만 역부족이다. 누군가가 섬세하고 사려 깊은 언어로 나의 실어증을 구제해주길 바래볼 뿐. 이러한 상황을 내게 불러일으킨 한 작가의 작업에 대해 말하려고 애쓰는, 자기 모순적 상황으로부터 글을 시작한다. 그러하기에 이 글은 애당초 언어의 한계를 지닌다. 한 작가의 작업을 비평하기에 앞서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쓰는 글이다.

능동적인 관찰자의 시선이 점차적으로 마비되어 간 것은 김남훈의 작업실이 있던 고양 레지던시를 찾아간 늦봄으로 거슬러 간다. 입주한지 몇 달 되지 않은 작업실에는 사물들이 차근차근 자리를 잡아 가는 중이었다. 작가와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그의 작업을 어떠한 맥락에서 접근할지 머릿속에서 분류하고 해석하기에 분주했다. 그때 이 글을 적어 내려갔다면 적당한 논리로 위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소 휑했던 작업실에는 쌓아둔 드로잉이 시간의 켜 마냥 한편에 두둑했고, 군데군데 분리된 작업은 파편과 같이 놓여 있었다. 사물들이 조심스레 자리를 잡아가던 그 공간에 침입한 낯선 주검이 눈에 띄었다. 작업실에 들어와 죽은 작은 날벌레들이다. 그가 차마 쓸어버리지 못하고 바닥에 놓아둔 벌레들은 알고 있었을까. 지독한 여름이 지나고 드러날 파열의 세계를, 이를 마주한 어느 관찰자의 언어 상실을 말이다.

 

여름내 쌓여가던 벌레들이 먼지 더미가 되어갈 때쯤 작가는 이 가여운 주검을 먼지 구덩이로부터 구제하기로 한다. 손으로 붙잡을 수조차 없는 그 연약한 몸을 핀셋으로 일일이 들어 올려 줄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열거된 한 줄의 벌레 옆에는 매일 세어진 죽음이 쓰인다. 230, 264, 243, 284, 287……. 하룻밤 새 쏟아진 방안의 죽음을 매일매일 기록한 작업이다.(<18911 죽음의 열거>, 2017) “수 천 개의 죽음을 간과”하고 살아가는 것을 눈앞에 증명해 보이는 이 작업 앞에서 믿었던 인식의 척도는 허물어진다. 불연속적이며 단층적인 이 죽음의 수는 인간 중심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도출된 것이다. 죽음의 수 앞에서 단언적이던 언어의 논리는 와해될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글은 무너져버린 언어를 주워 담는 식이다.

 

고장난 것 마냥 껌벅거리는 조명이 모스 부호를 통해 허공에 보내는 신호에는 “나를 잊지 말아요”란 메시지가 담긴다.(<모스_나를 잊지말아요>, 2017) 신호를 보내던 조명은 원래 건물에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철거지역에 방치된 조명을 수거한 것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에서 가시화된 버려진 것, 사라져 가는 것,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물은 모두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있어온 것들이다. 눈을 뜨고 있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놓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아니다.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해진 인간의 삶은 가치와 척도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제하고 소외시켜왔다. 창문으로 들어와 쌓인 날벌레들의 죽음을 세고, 콘크리트 틈 사이를 비집고 자라난 잡초에 물을 주고, 길바닥을 내뒹굴거나 짓눌려진 작은 사물(우리가 쓰레기라 부르는 것)을 기록하고, 플라스틱 봉지를 뜯고 버리는 귀퉁이 부분을 모으고, 건물의 파편들을 요오드 액에 담구고, 금이 난 건물과 사라짐의 흔적을 청테잎으로 더듬는 그의 작업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시선이 잘 닿지 않던 곳을 보도록 지시한다. 그리고는 망각과 부재의 흔적, 소실된 기억의 심연으로부터 불명료한 세상 곳곳을 응시하게 한다. 마치 ‘일상성에 내제된 실명 혹은 마비의 형식’(조르주 페렉)을 증언하듯 미시적 세계를 밝혀 보이는 그의 작업은 사라져 가는 것, 망각, 죽음을 삶으로 지연시키며 끈질기게 이를 추적해 보인다. 

 

눈뜬장님과 같은 삶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사유의 장을 열어 놓는 역할을 예술이 한다지만 예술은 객체의 위상까지도 전복시키는 자리를 제공하며 주체의 범주를 확장시켜오고 있다. 이렇게 세상의 서사를 작업으로 수렴하며 주체의 영역을 넓혀 가는 작가가 있는 반면, 이를 거부하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작가도 있다. 김남훈은 후자에 속한다. 작업의 서사를 시각적으로 증폭시키고자 하는 전술을 스스로 퇴진하며 작업을 이어온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상을 향한 최소한의 윤리적 태도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작업은 우리에게 익숙한 주체의 위치를 매 순간 위태롭게 하며, 이로부터 주변화 되거나 방치된 세계가 ‘존재해왔음’을 밝혀 보인다. 작업의 배후에 깊게 자리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기억 또한 그러할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을 집요하게 붙드는 그의 “사소한 기록”은 인간의 가장 간사한 생존방식인 ‘망각’에 대한 저항이자 이를 최대한 지연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나를 잊지말아요”에 이은 그의 또 다른 모스 작업은 “두려운 거요? 잊혀지는 거요”로 시작하는 한 영화의 대사를 전한다.(<모스_별>, 2017) 폐건물 집하장에서 수집해온 건물의 파편, 거리의 쓰레기, 죽은 날벌레, 손에 난 상처, 건물의 금은 모두 우리에게 잊혀져가는 시시한 것들이다. 이를 집요하게 모으고 분류하고 기록하는 과정은 결국 망각할 수밖에 없는 인식에 대한 반성이자 망각마저도 증언해 보이는 윤리적 실천과 맞닿는다. 불편한 것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일상적으로 보통 혹은 정상이라 여기는 우리의 기준부터 와해시킨다. “건물이 자신의 불안정을 벗어나고자 스스로 균열을 만들 듯..., 암도 내 몸의 일부로 볼 수 있듯...”이라 말하듯 그는 사고의 범주 밖에서의 세계, 인식의 반대편에서 세계가 존재함을 작업으로 토로해 보인다. 정상과 비정상, 질서와 무질서를 구분하는 인식의 오류를 되짚고, 우성과 열성을 구분하기보다는 “공우성”(개인전 제목이기도 한《co-dominance 공우성》)이란 공생의 원리에 주목하여 의미화 되지 못한 것을 발화하고자 한다. 그가 벽에 난 금 아래로 존재하는 틈의 공간을 가늠해 보고자 불명확한 영역을 더듬어 나가듯, 나는 언어의 한계로부터 말을 찾아내야하나 그럴수록 말은 사그라든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없는 말을 대신하여, 그의 작업실 창가에 놓인 한 문구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지나가는 먼지일 뿐.”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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